오래된정원의 借景

이순신장군의 위엄

2013. 4. 11. 17:58 : 역사




역사의 미스테리..


이순신은 전라도 곡창지대 일부를 철저히 지켜


'혼자'  임금 및 대신들까지 먹여살려가면서


'혼자' 조선군 전체의 군량 절반을 대가면서 싸웠습니다

Posted by 풍명금

이순신 장군 전적

2013. 4. 11. 17:36 : 역사

이순신장군 전적

1.옥포해전

 

a.도도 다카도라의 적선 26척 박살   왜 수군 총 4080명 전사    

 

b.적진포와 합포에서 적선 20척 추가 격멸.  왜 수군 총 2840명 전사   

 

c. 조선 수군 피해: 부상자 1명 / 사망자 없음 / 함선 손실 없음        

 

 

 

2. 사천/당포/당항포/율포 해전

 

a.사천에서 적선 13척 격침 왜 수군 총 2600여명 전사

 

b. 당포에서 적선 21척 격침 왜 수군 총 2820명 전사 / 적장 구루지마 미치유키 전사

 

c. 당항포에서 적선 26척 격침 2720명 전사

 

d. 율포에서 적선 3척 격침, 4척 포획

 

e. 조선 수군 피해: 4차례 전투 합산 결과 전사 11명 / 부상 47명 / 함선 손실 없음

 

 

 

3. 한산도 해전 

 

a. 59척 격침 14척 나포 왜 수군 총 8980여명 전사 / 와키자카 사베에, 와타나베 시치에몬, 마나베 사마노조 사망

 

b. 조선 수군 피해: 전사 19명, / 부상 116명, / 함선 손실 없음. 

 

 

 

 

4. 안골포/장임포/화준구미/다대포/서평포/절영도/초량목 해전

 

a.안골포에서 적선 42척 격침 왜 수군 총 3960여명 전사

 

b.장임포에서 적선 6척 격침 

 

c.화준구미에서 적선 5척 격침 

 

d.다대포에서 적선 5척 격침 

 

e.서평포에서 적선 8척 격침 

 

f.절영도에서 적선 9척 격침 

 

g.초량목에서 적선 4척 격침 

 

e.조선 수군 피해: 사망자 없음 / 부상자 없음 / 함선 손실 없음

 

 

 

 

5. 부산포 해전. 

 

a. 적선 128척 격침,왜 수군 총 3800여명 전사          

 

b. 조선 수군 피해: 전사자 6명 / 부상자 25명 / 함선 손실 없음        

 

   

 

 

6. 웅포 해전

 

a. 적선 51척 격침, 구와나 치카카쓰 전사, 왜 수군 총 2500여명 전사

 

b. 조선 수군 피해: 전사자 없음 / 부상자 없음 / 함선손실 없음

 

 

 

 

 

7. 당항포 해전

 

a. 적선 31척 격파

 

b. 조선 수군 피해: 전사자 없음 / 부상자 없음 / 함선 손실 없음

 

 

 

 

8. 명량해전 (조선 수군 13척, 2400여명 vs 왜 수군 연합 함대 330여척, 8만여 명) 

         

a. 적선 31척 격파, 120여척 반파, 총대장 도도 다카도라 부상, 구루지마 미치후사/하타 노부토키 전사 

    

   왜 수군 총 18000여명 전사

 

b. 조선 수군 피해: 전사자 4명 / 부상자 2명 / 함선 손실 없음

 

 

 

 

9. 절이도 해전

 

a. 적선 50여척 격파 

 

b. 조선 수군 피해: 전사자 없음 / 부상자 30명 / 함선 손실 없음

 

 

        

 

 

10. 예교성 전투

 

a. 적선 30여척 격멸, 11척 포획, 왜 수군 3400여명 전사

 

b. 조선 수군 피해: 전사자 없음 / 부상자 130여명 / 함선 손실 없음

 

 

 

 

11. 노량해전

 

a. 전선 200여척 침몰, 100여척 나포, 150여척 반파. 왜 수군 총  32000여명 사망

 

b. 조선 수군 피해: 전사자 10명 / 부상자 300여명 / 함선 손실 없음 

 

c. 특이 사항: 이순신 전사(11월 19일 아침 8시경)

 

 

 

 

12. 임진왜란 기간 동안의 기록 총합(7년 합산)

 

격파한 왜 수군 함선 수 합계 총: 1163척

 

왜 수군 사망자 숫자 합계 총 : 87700명

 

조선 수군 사망자(전투로 인한) 수 합계 총 : 52명

 

조선 수군 함선 손실 수 합계 총: 0척

 

 

23전 23승 승률100% . 왜군 8만7천7백명 전사, 아군 52명 전사.. 함선 손실0

 

 

 

특히 명량해전이 제일 인상적이군요.

저 52명 전사에 이순신장군이 있다는게 정말 안타깝습니다..

Posted by 풍명금

I. 사육신이란

모두 알듯 사육신이라 하면 1456년(세조2년) 6월 단종 복위 거사를 시도했다 발각되어 죽은 6명의 신하를 말합니다
이 6인은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이렇게 여섯 명을 꼽습니다. 이는 추강 남효온의 문집인 추강집 중 '육신전'에 언급된 인물들 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사육신들이 죽음에 이르던 시기에 남효온의 나이는 불과 2세. 당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직접 목격하거나 기억할 수 없는 나이였습니다. 
더욱이 세조의 왕위찬탈 후 정난공신들이 정국을 움켜쥔 상태였기에 사육신 문제는 사석에서라도 함부로 말 꺼내기조차 어려웠겠죠.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남효온은 장성한 후 시중에 떠돌던 이야기들을 듣고 모아 육신전을 쓰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사후인 1511년(중종6년) 에 '육신전'이 포함된 유고문집 '추강집'이 간행됩니다.
이후 사림으로 불리우는 재야 인사들을 중심으로 소리없이 읽히며 충절의 상징으로 알려지게 되죠.

그렇게 천하의 역적이었던 사육신은 조선사의 흐름에 따라 간간이 언급되다가 사건발생 244년 후인 숙종 시대에 이르러서야 단종과 함께 비로서 신원이 회복되고 충신으로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이리되다보니 남효온의 '육신전'은 정사인 실록처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졌고 급기야 단종의 능에 배향되고 전국에 조성된 사육신의 사당에도 그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흘러 1977년
서울시는 사육신 묘역을 정화하면서 사육신의 묘를 모두 모시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이때 그동안 잊혀져왔던 
'김문기'
란 이름이 후손들에 의해 등장하게 됩니다.

이 시기가 되어서야 '조선왕조실록'이 공개되어 원본을 사진으로 찍어 복제한 영인본이 간행되었고, 이를 읽은 '김문기'의 문중에서 실록에 따르면 김문기도 사육신의 한 분이니 사육신 묘역에 모셔달라는 탄원서를 서울시에 접수하게 된 것이죠. 그 내용인즉,
<실록에 의하면 사육신은 유응부 장신이 아니라 김문기 선생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남효온이 '육신전'을 쓸 때 김문기 선생과 유응부 장신을 혼동하여 오기한 것을 후세인들이 '육신전'에만 의지하여 처리하여 왔다. 이같은 관계로 김문기 선생이 사육신 명단에서 누락되었으니 사육신 명단을 정사에 의하여 바꾸지 않더라도 사육신 묘역에 김문기 선생의 가묘를 봉안하는 마땅하다>

이런 탄원서를 받은 서울시는 당시 '문교부'에 의뢰하였고 문교부는 다시 '국사편찬위원회'에 연락해 이 사안을 심의해 줄 것을 지시합니다. 
77년 9월 16일 국사편찬위원회는 실록과 육신전의 심도깊은 비교에 들어갔고 22일 만장일치로 다음의 결의사항을 발표합니다.



본 위원회는 조선왕조 시대의 기본 사료인 '조선왕조실록'에 의하여 학술적인 연구와 위원회의 토론을 거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1.세조 2년(1456) 6월 6일 갑진조에 팔도 관찰사, 절제사, 처치사에게 내린 선유문에 <이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유성원, 박중림, 권자신, 김문기, 성승, 유응부, 박쟁, 송석동, 최득지, 최치지, 윤영손, 박기년, 박대년 등이 반역을 음모하였다>라고 17인이 기록되어 있다.
2.세조2년 6월 8일 병오조에 병자정난(단종 복위 운동)관련자를 군기감 앞길에서 능지처참해 3일동안 머리를 매달아 놓은 사실과 주모한 관원의 활동상에 관한 기록을 검토하였다.
그들 중 특히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김문기 순으로 사육신을 들고 있으며, 김문기가 도진무로서 박팽년과 모의할 때 군사 동원을 맡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위에 든 사육신이 세조조에 가려진 육신이라고 판정된다.
3.숙모전 서무 배향 위차에 국혼 관계자를 제외한 병자정난 관원으로는 김문기의 위차가 수위에 해당된다
(공자를 모신 문묘에 배향된 우리나라의 현인들 중 김문기가 상위에 있단 얘기)

이상 1,2,3의 사료에 전거하여 판단하건대, 충의공 김문기를 헌창하여야 된다고 판단된다. '조선왕조실록'은 사관이 기록한 정사이고 '추강집'은 전하여 들은 바를 개인적으로 편찬한 것임을 밝힌다

1977년 9월 22일


이리하여 사육신 묘역에 '김문기'의 묘가 봉인되게 되었고 기왕에 있던 '유응부'의 묘도 그대로 둠으로 총 7기의 묘를 봉안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후 문제가 발생하니 이 논의가 진행되던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했던 인물이 
'김재규'
였고 그가 '김문기'선생의 후손이어서 김문기가 사육신에 포함되도록 위원회에 압력을 넣었다는 악의적인 괴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겁니다.
이런 와중에 2년후 김재규가 일으킨 10.26이 터졌고 이후,  '김문기'선생 얘기를 최초로 신문에 쓴 구석봉 씨와 김문기 문종의 종친회 회장이 보안사에 구금되고 실제 압력을 행사했는지 여부를 확인하려고 고문하는 어처구니없는 촌극이 벌어집니다. 나중엔 심지어 국회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등에서도 조사를 합니다.
물론, 조사 결과 그런 일은 없었죠. 




II. 실록과 교차 비교하여 나타난 육신전의 사육신 기록 오류

여러 오류가 나타나는데 대표적인 것만 들자면,

단종 즉위 시기 - 
실록에 따르면 1441년에 태어나 1453년에 즉위하니 13세의 나이가 되나 육신전엔 16세로 표기됩니다.

박팽년 -
실록에서 박팽년은 집행 하루 전에 고문을 못견디고 옥사한 것으로 기록되나 육신전에선 다른 이들과 함께 현장에서 사형당하는 것으로 기록됩니다

* 핵심 

'유응부' 와 '김문기' - 

1. 실록에서 고문에 끝까지 불복하였던 인물은 '오직 김문기'라 콕 찝어 명기하고 있으나 육신전에선 이를 '유응부'라 씁니다

2.육신전에선 '유응부'를 함길도 절제사를 지낸 인물이라 썼지만 실제 유응부는 경원 도호부사 겸 첨절제사를 지냈을 뿐이고, 단종복위운동에 참여한 인물 중 함길도 절제사를 지낸 인물은 '김문기'가 유일합니다

3.육신전에선 '유응부'는 재상(정승과 6조판서)을 지낸 인물이라 했으나 실제 그의 직책은 명예직인 동지중추원사(종2품)로 재상의 지위에 오른 적이 없었고, 김문기는 공조판서를 지내 재상을 지낸 인물이 됩니다.


이에 따라 정확한 사육신은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김문기 

 가 되어야 맞습니다. 

ps :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유응부 역시 단종복위 운동 때 별운검으로 뽑혀 거사를 함께 하려했던 훌륭한 분인 건 틀림없습니다



출처 : 불펜 http://mlbpark.donga.com/mbs/articleV.php?mbsC=bullpen&mbsIdx=2136492&cpage=1&mbsW=&select=&opt=&keyword=

Posted by 풍명금

보통 밀리터리 매니아들이 역사를 얘기할때나, 군사(軍史)를 얘기할때 동양3국의 무기선호도 및 명성에 대해 즐겨 말하곤 하는것이 바로 중국의 창, 한국의 활, 일본의 칼 입니다. 삼국지 시리즈나 기타 중국 무장들이 모두 극이나 월도처럼 창종류를 애용하는걸 보면 중국은 창이 맞아 보이고, 한국도 활에 대한 애착이나 이름 높은 명장들이 모두 활을 잘쐈던걸로 전해지는것을 보면 한국도 활에 대한 애착이 큰것으로 보입니다. 마찮가지로 일본도 사무라이를 상징하는 일본도나 각종 시대극에서 칼을 패용한 일본도를 보면 일본이 가장 선호하던 무기는 칼로 보여집니다. 그러다가 매우 우연찮은 기회에 이 '중국의 창, 한국의 활, 일본의 칼'의 원전격으로 보이는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네이버 캐스트 '조선군의 자존심 각궁'편(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4650&path=|454|&leafId=504)에서 입니다. 


이글의 시작으로 내세운 것이 바로 광해군대에 이수광이 편찬해낸 조선의 백과사전 지봉유설입니다. 


‘왜적들은 중국의 창법(槍法), 조선의 편전(片箭), 일본의 조총이 천하제일이라고 항상 말했다.’ 일본인들이 중국의 창술, 편전을 사용한 조선의 활쏘기, 일본의 조총을 동아시아 삼국을 대표하는 무술 혹은 무기로 손꼽았다는 이 기록은 1614년(광해군 6년)에 편찬된 조선의 백과사전인 [지봉유설]에 실려 있다. 이처럼 조선의 활쏘기는 이미 오래전부터 조선을 대표하는 무예로 인정 받았다.


그렇습니다. '중국의 창, 한국의 활, 일본의 칼'이 아니라 '중국의 창, 한국의 활, 일본의 조총이었던 것이죠.' 물론 조선의 역사 기록 이곳저곳에서 일본 검술에 대한 감탄의 흔적은 보입니다. 일본의 검술 즉 왜검(倭劍)을 조선에 전한 김체건은 왜검을 배우기 위해 왜관(倭館 = 조선시대 조선과 무역을 하기위한 일본인들의 집단거주지)에 노예로 들어가 3년간 어께넘어로 배워 익혔던 일화는 유명하죠. 


그러나 검 혹은 칼 이라는 무기는 전쟁에서  쓰임이 한정적인 무기이죠. 실제로 일본에서도 전쟁이 극에 달했던 전국시대에 주된 무기는 창과 조총이었습니다. 칼은 기병과 방어구를 갖춘 보병을 상대하기에는 그 위력이 매우떨어지기 때문이죠. 일본에서 이 칼이 무사 즉 사무라이의 상징으로 쓰이게 된것은 에도시대부터 입니다. 


조선에서 일본의 검술이 동경받았던 이유도 전쟁과는 다른 이유로 보여집니다. 첫번째로 왜구입니다. 왜구는 일본도를 주요 무장으로 많이 쓰곤 했다는데요. 왜구는 칼의 위력을 십분 활용할수 있었기 때문이죠. 왜구가 상대하는 이들은 그 고을의 치안병력과 일반 민초들입니다. 그들이 고가의 방어구를 입을 수 없기 때문에 대부분 경장이죠. 바로 전장에서 칼은 자신의 위력을 100% 발휘합니다. 고려말 조선시대 통털어 한반도의 해안을 유린했던 왜구들이 주력무기가 바로 이 일본도 즉 카타나였고, 그 공포심은 대단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또한 일본병사들의 뛰어난 백병전 전술이나 조총이 전세에 영향을 주었겠지만 전략적으로 조선이 당시 왜나라한테 밀린 근본적인 이유는 병력의 부족과 병력집중의 부재였습니다. 핵무기급의 전략무기가 있지 않은이상 단순한 무기가 전쟁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죠. 


이상 "중국의 창, 한국의 활, 일본의 칼???"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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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풍명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