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정원의 借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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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3.27 사육신과 김문기 그리고 김재규

I. 사육신이란

모두 알듯 사육신이라 하면 1456년(세조2년) 6월 단종 복위 거사를 시도했다 발각되어 죽은 6명의 신하를 말합니다
이 6인은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이렇게 여섯 명을 꼽습니다. 이는 추강 남효온의 문집인 추강집 중 '육신전'에 언급된 인물들 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사육신들이 죽음에 이르던 시기에 남효온의 나이는 불과 2세. 당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직접 목격하거나 기억할 수 없는 나이였습니다. 
더욱이 세조의 왕위찬탈 후 정난공신들이 정국을 움켜쥔 상태였기에 사육신 문제는 사석에서라도 함부로 말 꺼내기조차 어려웠겠죠.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남효온은 장성한 후 시중에 떠돌던 이야기들을 듣고 모아 육신전을 쓰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사후인 1511년(중종6년) 에 '육신전'이 포함된 유고문집 '추강집'이 간행됩니다.
이후 사림으로 불리우는 재야 인사들을 중심으로 소리없이 읽히며 충절의 상징으로 알려지게 되죠.

그렇게 천하의 역적이었던 사육신은 조선사의 흐름에 따라 간간이 언급되다가 사건발생 244년 후인 숙종 시대에 이르러서야 단종과 함께 비로서 신원이 회복되고 충신으로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이리되다보니 남효온의 '육신전'은 정사인 실록처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졌고 급기야 단종의 능에 배향되고 전국에 조성된 사육신의 사당에도 그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흘러 1977년
서울시는 사육신 묘역을 정화하면서 사육신의 묘를 모두 모시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이때 그동안 잊혀져왔던 
'김문기'
란 이름이 후손들에 의해 등장하게 됩니다.

이 시기가 되어서야 '조선왕조실록'이 공개되어 원본을 사진으로 찍어 복제한 영인본이 간행되었고, 이를 읽은 '김문기'의 문중에서 실록에 따르면 김문기도 사육신의 한 분이니 사육신 묘역에 모셔달라는 탄원서를 서울시에 접수하게 된 것이죠. 그 내용인즉,
<실록에 의하면 사육신은 유응부 장신이 아니라 김문기 선생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남효온이 '육신전'을 쓸 때 김문기 선생과 유응부 장신을 혼동하여 오기한 것을 후세인들이 '육신전'에만 의지하여 처리하여 왔다. 이같은 관계로 김문기 선생이 사육신 명단에서 누락되었으니 사육신 명단을 정사에 의하여 바꾸지 않더라도 사육신 묘역에 김문기 선생의 가묘를 봉안하는 마땅하다>

이런 탄원서를 받은 서울시는 당시 '문교부'에 의뢰하였고 문교부는 다시 '국사편찬위원회'에 연락해 이 사안을 심의해 줄 것을 지시합니다. 
77년 9월 16일 국사편찬위원회는 실록과 육신전의 심도깊은 비교에 들어갔고 22일 만장일치로 다음의 결의사항을 발표합니다.



본 위원회는 조선왕조 시대의 기본 사료인 '조선왕조실록'에 의하여 학술적인 연구와 위원회의 토론을 거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1.세조 2년(1456) 6월 6일 갑진조에 팔도 관찰사, 절제사, 처치사에게 내린 선유문에 <이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유성원, 박중림, 권자신, 김문기, 성승, 유응부, 박쟁, 송석동, 최득지, 최치지, 윤영손, 박기년, 박대년 등이 반역을 음모하였다>라고 17인이 기록되어 있다.
2.세조2년 6월 8일 병오조에 병자정난(단종 복위 운동)관련자를 군기감 앞길에서 능지처참해 3일동안 머리를 매달아 놓은 사실과 주모한 관원의 활동상에 관한 기록을 검토하였다.
그들 중 특히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김문기 순으로 사육신을 들고 있으며, 김문기가 도진무로서 박팽년과 모의할 때 군사 동원을 맡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위에 든 사육신이 세조조에 가려진 육신이라고 판정된다.
3.숙모전 서무 배향 위차에 국혼 관계자를 제외한 병자정난 관원으로는 김문기의 위차가 수위에 해당된다
(공자를 모신 문묘에 배향된 우리나라의 현인들 중 김문기가 상위에 있단 얘기)

이상 1,2,3의 사료에 전거하여 판단하건대, 충의공 김문기를 헌창하여야 된다고 판단된다. '조선왕조실록'은 사관이 기록한 정사이고 '추강집'은 전하여 들은 바를 개인적으로 편찬한 것임을 밝힌다

1977년 9월 22일


이리하여 사육신 묘역에 '김문기'의 묘가 봉인되게 되었고 기왕에 있던 '유응부'의 묘도 그대로 둠으로 총 7기의 묘를 봉안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후 문제가 발생하니 이 논의가 진행되던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했던 인물이 
'김재규'
였고 그가 '김문기'선생의 후손이어서 김문기가 사육신에 포함되도록 위원회에 압력을 넣었다는 악의적인 괴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겁니다.
이런 와중에 2년후 김재규가 일으킨 10.26이 터졌고 이후,  '김문기'선생 얘기를 최초로 신문에 쓴 구석봉 씨와 김문기 문종의 종친회 회장이 보안사에 구금되고 실제 압력을 행사했는지 여부를 확인하려고 고문하는 어처구니없는 촌극이 벌어집니다. 나중엔 심지어 국회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등에서도 조사를 합니다.
물론, 조사 결과 그런 일은 없었죠. 




II. 실록과 교차 비교하여 나타난 육신전의 사육신 기록 오류

여러 오류가 나타나는데 대표적인 것만 들자면,

단종 즉위 시기 - 
실록에 따르면 1441년에 태어나 1453년에 즉위하니 13세의 나이가 되나 육신전엔 16세로 표기됩니다.

박팽년 -
실록에서 박팽년은 집행 하루 전에 고문을 못견디고 옥사한 것으로 기록되나 육신전에선 다른 이들과 함께 현장에서 사형당하는 것으로 기록됩니다

* 핵심 

'유응부' 와 '김문기' - 

1. 실록에서 고문에 끝까지 불복하였던 인물은 '오직 김문기'라 콕 찝어 명기하고 있으나 육신전에선 이를 '유응부'라 씁니다

2.육신전에선 '유응부'를 함길도 절제사를 지낸 인물이라 썼지만 실제 유응부는 경원 도호부사 겸 첨절제사를 지냈을 뿐이고, 단종복위운동에 참여한 인물 중 함길도 절제사를 지낸 인물은 '김문기'가 유일합니다

3.육신전에선 '유응부'는 재상(정승과 6조판서)을 지낸 인물이라 했으나 실제 그의 직책은 명예직인 동지중추원사(종2품)로 재상의 지위에 오른 적이 없었고, 김문기는 공조판서를 지내 재상을 지낸 인물이 됩니다.


이에 따라 정확한 사육신은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김문기 

 가 되어야 맞습니다. 

ps :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유응부 역시 단종복위 운동 때 별운검으로 뽑혀 거사를 함께 하려했던 훌륭한 분인 건 틀림없습니다



출처 : 불펜 http://mlbpark.donga.com/mbs/articleV.php?mbsC=bullpen&mbsIdx=2136492&cpage=1&mbsW=&select=&opt=&keyword=

Posted by 풍명금